북반구 기준 10월, 봄에 심은 천궁 두둑에서 잎이 누렇게 시들기 시작합니다. 호미로 흙을 헤치면 마디진 뿌리줄기가 나오고, 손에 묻은 흙에서도 짙은 향이 납니다. 천궁(Cnidium officinale)은 미나리과 여러해살이풀이며, 그 뿌리줄기는 음식과 약재로 쓰여 왔습니다. 17세기 초 허준이 엮은 《동의보감》도 이 뿌리를 따로 다뤘습니다.
《동의보감》이 적은 궁궁이
《동의보감》은 이 풀을 草部(풀 항목)에 궁궁(芎藭)으로 싣고, 한글로 '궁궁이'라는 이름을 달았습니다. 성질은 따뜻하고(溫) 맛은 매우며(辛) 독이 없다(無毒)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따뜻하다'는 한의학에서 약의 성질을 나누는 말로, 온도계로 재는 온도와는 다릅니다. 원전은 이 풀을 곳곳에서 심어 가꾼다고 했고, 음력 3월과 9월에 뿌리를 캐어 볕에 말린다고 했습니다.
어떤 덩이를 좋게 쳤는지도 적혀 있습니다. 덩이가 무겁고 실하며 참새 머리처럼 생긴 것을 작뇌궁(雀腦芎)이라 하여 가장 좋게 보았고, 싹 끝에 달린 작은 덩이는 무궁(蕪芎)이라 따로 불렀습니다. 쓰는 법에는 홀로 오래 먹지 말고 다른 약과 함께 쓰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이 대목은 옛 의서의 서술이지 지금의 의학 판단이 아닙니다. 원문 표제와 풀이는 호미클럽 동의보감 궁궁이 항목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요즘 분석이 찾아낸 성분
여러 연구진이 천궁 무리의 뿌리줄기에서 리구스틸라이드(ligustilide)를 비롯한 프탈라이드(phthalide) 계열 화합물을 분리해 보고했습니다. 리구스틸라이드는 이 무리의 향을 이루는 성분이고, 짙은 향의 대부분은 휘발 성분인 정유(essential oil)에서 나옵니다. 이 밖에 식물에 널리 퍼진 페놀산인 페룰산(ferulic acid)과, 덩이를 무겁고 실하게 만드는 저장 성분인 전분도 들어 있습니다.
같은 분석들은 말리고 보관하는 동안 휘발 성분의 조성이 달라진다는 결과도 실었습니다. 다만 이 연구들은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살핀 성분 분석이며, 각 성분이 몸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까지 밝힌 자료는 아닙니다.
겹치는 곳과 갈리는 곳
《동의보감》은 이 뿌리의 맛이 맵다고 적었고, 요즘 분석은 같은 뿌리에서 향이 짙은 휘발 성분을 찾아냈습니다. 옛 기록은 맛에서, 요즘 분석은 향에서 이 뿌리가 세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덩이가 무겁고 실한 것을 좋게 친 대목은 전분이 덩이를 무겁고 실하게 만든다는 분석과 들어맞습니다. 음력 9월은 양력으로 대개 10월 앞뒤라서, 옛 기록의 가을 채취 시기는 지금 텃밭의 수확 달(10~11월)과 거의 같습니다.
갈리는 곳도 있습니다. 옛 기록은 성질과 맛, 독이 있는지 없는지로 약을 나눴고, 요즘 분석은 화합물 이름과 조성을 적습니다. 그래서 '따뜻하다'는 말을 성분 하나에 그대로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이름도 엇갈립니다. 천궁이라는 이름은 Cnidium officinale 계통과 Ligusticum 계통에 함께 쓰이고, 산과 들에 나는 궁궁이(Angelica polymorpha)는 속(屬)이 다른 풀인데도 옛 이름이 겹칩니다. 그러니 심을 뿌리줄기나 말린 약재를 사실 때는 학명을 함께 확인해 보세요.
심고 캐고 말리기
천궁은 북반구 기준 3~4월에 심고 10~11월에 캡니다. 재배 달력과 성분, 함께 먹기 좋은 재료는 호미클럽 작물도감의 천궁 항목에 모아 두었습니다. 지금 캐셨다면 흙을 털고 뿌리줄기를 씻은 뒤 얇게 저며 볕에 말려 보세요. 통째로 두면 속까지 마르지 않아 곰팡이가 슬기 쉽습니다. 완전히 마르면 밀폐 용기에 담아 서늘한 곳에 두고, 오래 보관할 것은 냉동실에 넣으세요. 말리고 보관하는 동안 휘발 성분이 달라진다는 분석을 생각하면, 공기와 열을 피해 두어야 향이 덜 변할 것입니다.
부엌에서 쓰는 법
한국에서는 백숙(baeksuk, 닭을 통째로 물에 삶은 음식)이나 족발(jokbal, 간장 국물에 삶은 돼지 족)을 삶을 때 천궁을 넣어 누린내를 가립니다. 물이 끓어오른 뒤에 두세 조각을 넣고 20분쯤 두었다가 건져 보세요. 처음부터 넣고 오래 끓일 때보다 향이 더 남습니다. 많이 넣으면 국물이 쓰니 양을 늘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달여 마실 때는 대추를 함께 넣어 보세요. 단맛이 붙어 향이 부드러워집니다. 물이 끓으면 약한 불로 줄여 뭉근히 달입니다. 다만 《동의보감》이 홀로 오래 먹지 말라고 적은 만큼, 날마다 오래 마실 생각이라면 한의사나 약사와 먼저 상의해 보세요.
오늘은 캔 뿌리 한 덩이를 얇게 저며 볕에 널어 보세요.
출처: 허준 엮음, 《동의보감》 草部 궁궁(芎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