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 텃밭에서 손이 가장 덜 가는 곳은 마당 한쪽 물확입니다. 봄에 모 세 포기를 옮겨 심어 둔 곳인데, 물만 대 주는 사이 이삭이 나와 낟알이 노랗게 여물었습니다. 벼를 텃밭 작물로 꼽는 일은 드뭅니다. 고추와 가지는 끝물을 정리해야 하는 때지만, 벼는 서리가 내릴 무렵까지 그대로 두는 편이 낫습니다. 《동의보감》이 이 쌀을 어떻게 적었는지 보면 그 이유가 짐작됩니다.
《동의보감》은 '됴한 니쌀'이라 적었습니다
《동의보감》 곡부(穀部)에는 벼에서 얻는 쌀이 갱미(粳米)로 실려 있습니다.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고 쓰며 독이 없다고 했습니다. 갱(粳)은 굳다는 뜻이어서 찹쌀보다 단단한 쌀을 가리킨다고 글자 뜻을 풀었습니다. 한국어 이름은 '됴한 니쌀', 곧 좋은 멥쌀이라 달아 두었습니다.
먹는 법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서리 뒤에 거둔 늦벼 흰쌀을 으뜸으로 쳤고, 설익히기보다 푹 익혀 밥과 죽으로 먹으라 했습니다. 창고에서 오래 묵은 쌀은 진름미(陳廩米)로 따로 세워, 성질이 차서 자주 먹으면 설사한다고 경계했습니다. 묵었다는 것은 3~5년 지난 쌀을 말한다고 밝혀 두었습니다. 옛 의서의 기록이며 오늘 의학의 판단과는 다릅니다. 원문 항목은 호미클럽 동의보감 갱미 풀이에서 그대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쌀에서 재는 것들
밥의 찰기와 식감을 정하는 것은 전분입니다. 그 가운데 아밀로스(amylose)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가 찰기를 가릅니다. 옛 기록이 멥쌀과 찹쌀을 단단함으로 나눴다면, 오늘은 이 성분 비율로 같은 차이를 설명합니다.
도정하면 겉의 겨와 쌀눈이 깎여 나갑니다. γ-오리자놀(gamma-oryzanol)은 현미에 남고 백미에는 거의 없습니다. 현미를 싹 틔우면 GABA(감마아미노부티르산)가 백미나 그냥 현미보다 많아진다는 분석이 여럿 나왔습니다. 다만 싹 틔우는 온도와 시간에 따라 값의 차이가 크다는 단서가 붙습니다.
도정을 덜 한 쌀로 지은 밥을 먹었을 때 백미밥보다 식후 혈당이 완만하게 올랐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품종과 조리법, 식히는 정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므로 혈당 관리를 대신하는 식사법으로 읽지는 않는 편이 좋습니다.
겹치는 곳과 갈리는 곳
푹 익혀 먹으라는 대목은 오늘의 조리 설명과 맞닿습니다. 충분히 익은 전분이 소화에 편하다는 점은 지금도 같습니다.
갈리는 곳은 흰쌀입니다. 옛 기록은 잘 쓿은 흰쌀을 으뜸으로 쳤지만, 오늘은 깎여 나간 겨 쪽에 남는 성분을 함께 봅니다. 묵은 쌀을 경계한 대목도 다시 읽힙니다. 겨에 든 기름기는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쉬우므로, 보관이 어려웠던 시절에 겨를 벗긴 쌀을 높이 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설명은 추정이며 원문이 그렇게 적은 것은 아닙니다.
물확 한 개로 짓는 벼농사
벼는 물이 넉넉한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랍니다.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주식 곡물로 기릅니다. 북반구 기준 4~5월에 모를 내고 9~10월에 거둡니다. 남반구라면 반년을 옮겨 잡으시면 됩니다. 밭이 없어도 됩니다. 물이 새지 않는 물확이나 고무통에 흙을 절반쯤 채우고, 흙이 3~5cm 잠기게 물을 부어 보세요.
- 물이 마르지 않게만 살핍니다. 벼는 물이 고인 상태를 견딥니다.
- 이삭이 나오면 새가 먼저 찾아옵니다. 그물을 씌워 두세요.
- 낟알이 단단해지고 잎이 노래지면 벱니다. 며칠 말린 뒤 훑어서 껍질을 벗깁니다.
거둔 쌀로 밥을 지을 때는 곁들일 것까지 같이 정해 보세요. 쌀은 라이신(lysine)이 적고 콩은 많아, 함께 안치면 아미노산 구성이 서로 채워집니다. 콩은 미리 불리고, 팥은 첫 삶은 물을 버린 뒤 안칩니다. 김이나 미역국은 곡물에 적은 요오드와 무기질을 채워 주는데, 짠 해조를 더할 때는 국의 간을 낮춥니다. 김치와 된장은 신맛과 감칠맛을 보태 흰쌀밥의 단조로운 맛을 채워 줍니다. 다만 젖산균과 함께 나트륨도 들어오므로 국물까지 다 비우지는 않습니다. 품종과 심는 달, 어울리는 재료는 호미클럽 작물 도감의 벼 항목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올가을 밥을 안칠 때 흰쌀에 현미를 한 줌 섞어 보세요. 서리 뒤 늦벼를 으뜸으로 친 옛 기록과 겨에 남는 성분을 보는 오늘의 설명을 한 그릇에서 견줘 볼 수 있습니다. 물확은 내년 봄에 하나 준비하시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