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한 귀퉁이의 대파
호미님 텃밭에 대파 몇 줄기는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한번 심어 두면 베어 먹어도 다시 올라오고, 김치찌개나 국물 요리에 한 줌 썰어 넣으면 향이 확 살아납니다. 흙만 적당하면 손이 많이 가지 않아 초보 호미님도 곧잘 거두는 작물입니다.
그런데 식탁 위 이 흔한 대파가 옛 의서 안에서는 어엿한 약재 대접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잘라 버리거나 국물용으로만 쓰는 흰 밑동, 그 부분이 주인공입니다. 매일 무심코 다루던 재료에 옛 사람들이 어떤 이름을 붙여 두었는지 알고 나면, 다음 번에 칼을 댈 때 손길이 조금 달라집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동의보감은 이렇게 보았습니다
동의보감은 파의 흰 밑동을 따로 총백(蔥白)이라 부르며 다루었습니다. 맛은 맵고 성질은 서늘(또는 평)하며 독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매운맛만 떠올리는 파에 '서늘함'을 함께 적어 둔 점이 눈에 띕니다.
쓰임의 핵심은 추위를 흩는 데 있었습니다. 동의보감은 총백을 풍한(風寒), 곧 찬 기운으로 생긴 오한과 발열을 흩고 땀을 내는 발한·통양약으로 보았습니다. 발한은 땀을 내어 기운을 풀어 준다는 뜻이고, 통양은 막힌 양기의 길을 통하게 한다는 옛 표현입니다. 그래서 초기 감기, 옛말로 풍한감모에 즐겨 썼다고 합니다. 몸이 으슬으슬한 첫머리에 가까이 두고 쓰던 재료였던 것입니다. 몸이 으슬으슬할 때 따뜻한 파국 한 그릇을 떠올리면, 이 옛 기록이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동의보감은 총백이 인후의 막힘을 다스리고 오장을 소통시키며 여러 약독을 푼다고도 기록했습니다. 막힌 곳을 뚫고 기운이 도는 길을 열어 준다는 시선입니다. 대표 처방으로는 생강과 함께 달인 총백산이 전해집니다. 파와 생강이라는, 지금 우리 부엌에도 늘 있는 두 재료의 조합입니다.
정리하면 동의보감 속 대파는 매운 향으로 찬 기운을 흩고, 땀을 내며, 막힌 길을 소통시키는 재료였습니다. 옛 사람들에게는 밭에서 바로 거두어 쓰는 가까운 살림집 약재였던 셈입니다.
오늘의 영양학과 견주면
이 옛 기록을 현대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대파의 코를 찌르는 매운 향은 황화합물에서 비롯됩니다. 파를 썰 때 눈이 시큰해지고 콧속이 알싸해지는 그 자극이 이 성분들의 신호입니다. 이 성분들은 항균이나 혈액 순환과 관련해 종종 거론됩니다. 추위를 흩고 막힌 곳을 소통시킨다고 본 동의보감의 시선과, 향 성분을 이야기하는 오늘의 설명이 묘하게 한 방향을 가리키는 듯도 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물러서겠습니다. 황화합물을 두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 근거는 아직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옛 기록과 현대의 성분 이야기가 닮은 결을 보인다고 해서, 대파가 감기를 낫게 한다거나 무엇을 치료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동의보감의 기록은 그 시대의 경험과 관점이고, 오늘의 영양학은 또 그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미님께서는 두 시선을 나란히 두고 즐기시되, 어느 한쪽을 약속처럼 받아들이지는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텃밭에서 식탁으로
활용은 어렵지 않습니다. 동의보감이 흰 밑동을 귀하게 보았으니, 국물 요리를 끓일 때 그 부분을 버리지 말고 함께 넣어 보십시오. 찬 바람에 몸이 으슬으슬한 날에는 파 흰 대를 큼직하게 썰어 생강 몇 조각과 함께 끓인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이 옛 처방의 결과 닿아 있습니다. 거창한 약이 아니라, 평소 끓여 드시던 그 국물입니다.
푸른 잎 부분은 향을 살리는 고명으로 마지막에 얹으면 좋습니다. 불에 오래 두면 향이 날아가니, 잎은 그릇에 담기 직전에 넣는 편이 좋습니다. 생으로 송송 썰어 무침이나 양념에 넣어도 매운 향이 입맛을 돋웁니다. 흰 밑동과 푸른 잎의 결이 다르니, 끓이는 부분과 마지막에 얹는 부분을 나누어 쓰시면 한 줄기 대파를 알뜰히 누리실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일러두겠습니다. 파의 매운 향은 위장이 예민한 분께는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생파를 한꺼번에 많이 드시기보다 익혀서 알맞게 드시는 편이 편안합니다. 텃밭에서 갓 베어 온 대파 한 줄기, 식탁 위에서 향과 함께 옛 의서의 기록까지 떠올려 보시면 한 끼가 한결 든든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