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반구 텃밭에 가을이 드는 9월 말, 녹두 꼬투리가 하나둘 검게 변합니다. 녹두는 꼬투리가 한꺼번에 익지 않아서 검어진 것부터 며칠 간격으로 나눠 땁니다. 너무 오래 두면 마른 꼬투리가 저절로 터져 알이 밭에 흩어집니다. 손바닥에 모인 작고 푸른 알은 숙주가 되고, 묵이 되고, 빈대떡이 됩니다. 이 콩을 400여 년 전의 의서는 어떻게 적어 두었을까요?
《동의보감》이 적어 둔 녹두
17세기 초 허준이 엮은 《동의보감》은 녹두(菉豆)를 곡식을 모은 곡부(穀部)에 실었습니다. 성질은 차다고(性寒) 하면서 평하다는 일설도 덧붙였습니다. 맛은 달고 독이 없다고(味甘 無毒) 적었습니다. 껍질과 속도 따로 보아, 껍질은 차고 속은 평하다고(皮寒肉平) 갈라 두었습니다. 좋은 녹두로는 빛이 푸르고 둥글며 알이 작은 것을 꼽았습니다.
쓰는 법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녹두를 물에 담갔다가 갈고, 걸러서 가라앉힌 앙금을 말려 가루로 썼습니다. 원전은 이 가루를 녹두분(菉豆粉)이라 부르며 따로 다뤘습니다. 녹두로 베개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실려 있습니다. 다만 이 내용은 옛 의서의 기록이며, 현대 의학의 판단과는 다릅니다. 원문과 풀이는 호미클럽 동의보감 녹두 항목에서 볼 수 있습니다.
껍질과 속, 옛 기록과 성분 분석이 겹치는 곳
껍질과 속을 갈라 본 옛 기록은 오늘의 성분 분석과 견줘 볼 만합니다. 여러 분석 연구에서 녹두 껍질의 비텍신(vitexin)과 이소비텍신(isovitexin) 같은 플라보노이드(flavonoid)를 확인했습니다. 식이섬유도 껍질 쪽에 많이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껍질을 벗긴 거피 녹두에서는 이 성분들이 크게 줄어듭니다. 속에는 콩과 작물답게 단백질이 많고, 엽산(folate) 함량도 콩류 가운데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옛 의서가 '차다·평하다'로 가른 기준과 성분을 재는 기준은 다릅니다. 《동의보감》의 성질 구분은 성분표의 숫자로 옮길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두 기록이 겹치는 곳은 한 알의 녹두라도 껍질과 속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관찰까지입니다. 성분 분석 결과 또한 병을 막거나 고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싹을 틔우면 달라지는 것, 숙주의 비타민 C
옛 기록에는 없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른 녹두에는 비타민 C가 거의 없지만, 싹을 틔운 숙주에서는 비타민 C가 검출되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면서 성분 조성이 달라지는 현상으로 설명됩니다. 비타민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수백 년 전에 엮인 《동의보감》이 다룰 수 없던 내용입니다.
숙주는 텃밭이 없어도 부엌에서 기를 수 있습니다. 불린 녹두를 빛이 들지 않는 그릇에 담고, 하루 몇 차례 물을 부었다가 따라 내면 며칠 안에 하얀 싹이 올라옵니다. 밭일이 끝난 겨울에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여름에 심어 가을에 거두기
녹두(학명 Vigna radiata)는 콩과 한해살이풀로,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랍니다. 인도·중국·동남아시아에서 많이 기릅니다. 북반구 기준으로 6~7월에 씨를 뿌리고 9~10월에 거둡니다. 날이 충분히 더워진 뒤에 뿌리므로 봄 작물을 거둔 이랑에 이어 심기 좋습니다.
- 씨는 밭에 바로 뿌립니다. 콩과 작물이라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됩니다.
- 질소 거름을 많이 주면 잎만 무성해지고 꼬투리가 적게 달립니다.
- 딴 꼬투리는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말린 뒤 두드려 알을 털어 냅니다.
심는 달과 성분 정보는 녹두 작물 도감에 모아 두었습니다.
껍질째 먹는 밥, 앙금만 쓰는 묵
녹두 요리는 껍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나뉩니다. 껍질의 비텍신과 식이섬유까지 챙기고 싶다면 껍질째 짓는 녹두밥이 알맞습니다. 마른 녹두는 쌀보다 익는 데 오래 걸리므로 두세 시간 불리거나 한 번 삶아 두었다가 섞어 보세요. 쌀과 녹두를 8 대 2 정도로 시작하면 무난합니다.
빈대떡은 흔히 껍질을 벗긴 녹두를 불려 갈아서 기름에 부칩니다. 담백한 녹두에 돼지고기 기름과 신 김치의 산미가 더해지면 맛의 균형이 잡힙니다. 숙주를 함께 넣으면 씹는 맛이 살아납니다.
녹두묵(청포묵)은 재료가 녹두와 물뿐입니다. 불린 녹두를 갈아 체에 거르고, 가라앉힌 앙금만 모아 저어 가며 끓입니다. 앙금을 얻기까지는 《동의보감》에 적힌 녹두가루 만드는 법과 순서가 같습니다. 껍질은 체에 걸러 빠지므로, 묵은 껍질 성분보다 녹두 앙금의 매끄러운 식감을 즐기는 음식입니다.
올가을 거둔 녹두가 있다면, 한 줌은 껍질째 밥에 섞고 한 줌은 물에 불려 숙주로 틔워 보세요.
출처: 허준, 《동의보감》 탕액편 곡부 「녹두(菉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