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첫 주, 여름 작물을 걷어낸 이랑이 비었습니다. 이런 자리는 서리 내릴 때까지 그냥 두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씨를 넣어 두면 겨울을 넘기고 이른 봄에 첫 나물을 거두는 풀이 있습니다. 산형과 여러해살이풀 전호(Anthriscus sylvestris)입니다. 한국 남해안에서는 2월부터 4월 사이에 어린 순을 뜯어 나물로 먹습니다.
《동의보감》 초부에 적힌 前胡
《동의보감》 초부(草部)에는 前胡라는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성질이 약간 차고, 맛은 달면서 매우며, 독이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곳곳에 나며 음력 2월과 8월에 뿌리를 캐어 볕에 말려 쓴다고 했습니다. 옛 한글 이름은 '샤양불휘'로 남아 있습니다. 잎을 데쳐 무치는 나물이 아니라, 말린 뿌리를 다루는 약재에 관한 기록입니다. 옛 의서에 적힌 내용이며 현대 의학의 판단과는 다릅니다. 원문과 우리말 풀이는 호미클럽 동의보감 풀이에 나란히 실어 두었습니다.
이름이 같고 종이 다른 두 풀
대한민국약전은 약재 前胡의 기원을 백화전호(Peucedanum praeruptorum)나 바디나물(Angelica decursiva)의 뿌리로 정해 두었습니다. 남해안 밭에서 기르는 나물 전호는 Anthriscus sylvestris입니다. 이름만 같은 다른 식물입니다. 그래서 옛 기록의 성질과 맛을 밭에서 뜯은 잎에 그대로 옮겨 적기는 어렵습니다. 호미클럽 도감이 옛 기록을 따로 떼어 싣고, 성분과 쓰임은 오늘의 자료에서만 가져오는 까닭입니다.
오늘 확인되는 성분
잎을 자를 때 올라오는 냄새는 정유(essential oil)라 부르는 휘발성 성분에서 나옵니다. 데치는 시간과 불의 세기에 따라 이 성분이 얼마나 남는지가 달라집니다. 잎 조직은 식이섬유, 곧 다당류로 이루어져 있어 데친 뒤에도 씹는 결이 남습니다. 녹색 잎채소에서는 카로티노이드(carotenoid) 계열 색소인 베타카로틴(beta-carotene) 등이 보고됩니다. 다만 이 나물 잎을 100g 단위 수치로 정리한 성분표는 도감에 아직 없습니다. 확인된 범위 안에서만 적어 둡니다.
옛 기록이 말한 '달면서 맵다'는 감각은 오늘 정유로 설명하는 냄새, 알싸한 맛과 겹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차다, 덥다로 나누던 구분은 지금의 성분 분석과 견주기 어렵습니다. 겹치는 곳은 겹친다고, 견줄 수 없는 곳은 견줄 수 없다고 적는 편이 정확합니다.
가을에 뿌려 봄에 거두기
씨는 북반구 기준 9~10월에 뿌립니다. 더위가 한풀 꺾인 뒤 싹이 터 겨울을 나고, 이듬해 2~4월에 어린 순을 땁니다. 여러해살이풀이라 한 번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 봄에도 순이 다시 올라옵니다. 남반구에 계신다면 일정을 여섯 달 옮겨 3~4월에 뿌리고 8~10월에 거두면 됩니다. 심는 달과 거두는 달을 정리한 달력은 전호 도감에 있습니다.
봄 밥상에 올리는 법
거둔 순은 살짝 데쳐 찬물에 헹군 다음, 물기를 꼭 짜고 씁니다. 물기가 남으면 양념이 겉돕니다.
- 무침: 된장(doenjang, 콩 발효 장)과 들기름에 무쳐 보세요. 기름과 섞이면 냄새가 덜 날아가고, 된장의 짠맛이 있어 알싸한 맛이 누그러집니다.
- 전: 어린잎을 통째로 밀가루 반죽에 넣어 전(jeon, 반죽을 입혀 기름에 지진 부침)을 부쳐도 좋습니다. 잎이 두꺼우면 반으로 갈라 넣으세요.
- 국: 된장국이나 맑은 국에는 불을 끄기 직전에 넣습니다. 오래 끓이면 잎이 뭉그러집니다. 한 냄비에 한 줌이면 넉넉합니다.
오늘 비어 있는 두둑 한 줄을 골라 씨를 뿌려 두세요. 봄에 첫 순을 무쳐 먹을 때, 옛 의서의 前胡와 접시에 오른 이 나물이 서로 다른 풀이라는 점도 떠올려 보세요.
출처: 《동의보감》 탕액편 초부, 대한민국약전 생약 규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