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두 번 벤 쪽의 밑동에서 다시 올라온 가지 끝에 연분홍 꽃이삭이 달렸습니다. 10월 하순, 꽃이 진 자리마다 작고 검은 씨가 맺히는 때입니다. 옆 고랑의 여뀌 씨와 나란히 놓고 보면 모양은 닮았는데 쪽 씨가 더 굵고 더 검습니다. 이 비교를 400년 전 의서가 먼저 적어 두었습니다.
《동의보감》 초부에 실린 남실(藍實)
《동의보감》 초부(草部)에는 쪽이 남실(藍實), 곧 쪽의 씨로 실려 있고 한글로 '족 ᄡᅵ'라 적혀 있습니다. 성질은 차다 하면서 냉하다는 말도 있다고 두 설을 함께 두었고, 맛은 쓰다 하면서 달다는 말도 있다고 했습니다. 독은 없다고 적었습니다. 지금 심어 가꾸는 대람(大藍)의 씨가 이것이라 했고, 음력 5~6월에 씨를 거두며 여뀌 씨를 닮았으나 크고 검다고 했습니다. 원문의 글귀와 풀이는 동의보감 남실 항목에 옮겨 두었습니다.
표제는 씨입니다. 옛 의서는 씨의 성질과 맛만 적었고, 염료로 쓰는 잎은 이 항목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성질과 맛을 두 설씩 나란히 둔 것은 편찬자가 서로 다른 본초의 기록을 고르지 않고 함께 실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의 의서가 옮긴 본초의 설입니다. 지금의 영양학과 의학은 쪽 씨를 먹을거리로 다루지 않습니다.
갓 벤 잎이 파랗지 않은 까닭
쪽 잎을 손으로 비벼도 바로 남색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잎 안에 든 것은 색이 없는 인디칸(indican)이라는 배당체입니다. 잎이 시들거나 짓무르면 잎 속 효소가 인디칸을 쪼개고, 떨어져 나온 조각이 공기 중에서 둘씩 짝을 지어 남색의 인디고(indigo), 다른 이름으로 인디고틴이 됩니다. 아돌프 폰 바이어가 1883년에 이 색소의 분자 구조를 밝혔고, 1897년에는 독일 바스프(BASF)가 합성 인디고를 팔기 시작하면서 쪽 농사는 크게 줄었습니다. 색이 밭에서 생기지 않고 잎을 벤 뒤에 생긴다는 점이 뒤에 이어지는 물들이기 순서를 정합니다.
《동의보감》과 겹치는 곳은 이름입니다. 둘 다 이 풀을 남(藍), 남색을 내는 풀로 부릅니다. 다른 곳은 보는 자리입니다. 옛 기록은 씨의 성질을 적었고, 지금의 화학은 잎의 색소를 다룹니다. 호미클럽 도감도 쪽을 염료 작물로 다루어 비타민이나 무기질 수치를 두지 않습니다. 잎은 먹지 않고 물들이는 데 씁니다.
물에 녹지 않는 색을 천에 들이는 순서
인디고는 물에 녹지 않습니다. 가루를 물에 타서 천을 담가도 섬유 안으로 들지 않습니다. 벤 잎을 물에 담가 삭히면 그 사이에 인디고가 물에 녹는 형태로 바뀌고, 이때 볏짚이나 콩대를 태운 재를 우려 받은 잿물을 넣어 통을 알칼리로 유지합니다. 삭은 쪽은 알칼리에서만 천에 드는 형태로 풀립니다. 천을 통에서 꺼내는 순간 공기와 만나 다시 녹지 않는 알갱이로 돌아가고, 그 알갱이가 섬유 사이에 남습니다. 담갔다 꺼내기를 되풀이할수록 색이 짙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번 담그는 시간과 꺼내 바람에 두는 시간을 각각 10분 안팎으로 잡고, 네댓 번은 되풀이해야 흔히 보는 쪽빛이 납니다.
천은 가려 씁니다. 무명·삼베·모시 같은 식물성 섬유가 쪽빛을 가장 잘 받고, 명주나 모직은 같은 통에서도 색이 다르게 오르며, 합성 섬유에는 거의 들지 않습니다. 물들이기 전에 풀기를 빼고 두세 번 빨아 말려 두면 색이 고르게 듭니다.
4~5월에 심어 7~8월에 베는 한해살이
쪽은 한해살이풀로, 북반구에서는 4~5월에 씨를 넣고 7~8월에 잎을 벱니다. 심는 달과 거두는 달은 쪽 작물도감에 달력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 씨는 흙 1cm 깊이로 덮고, 땅 온도가 20℃ 안팎이 되면 싹이 고르게 납니다. 묘판에 뿌려 키 10cm쯤 되면 25~30cm 간격으로 옮겨 심어 보세요.
- 7월에 키가 50~60cm쯤 되고 꽃대가 서기 전, 밑동 10cm를 남기고 벱니다. 남긴 밑동에서 다시 자라 8월 말에 한 번 더 벨 수 있습니다.
- 벤 잎은 그날 바로 물에 담가 삭히거나 그늘에 말려 둡니다.
- 두세 포기는 베지 않고 두어 꽃을 받으세요. 서리 전 10~11월에 검게 익은 씨를 받아 종이봉투에 말리면 다음 해 봄에 쓸 씨가 됩니다.
씨를 받는 달은 《동의보감》이 적은 음력 5~6월과 맞지 않습니다. 원문이 중국 본초의 기록을 옮긴 것이라 기후와 품종이 지금 텃밭의 쪽과 달랐을 수 있습니다.
통에서 꺼낸 천은 처음에는 누런빛입니다. 바람을 쐬는 몇 분 사이에 초록으로, 다시 파랑으로 바뀝니다. 벤 뒤에 비로소 색이 생기는 풀이라, 그 몇 분을 기다려 주는 일까지가 쪽 농사에 들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