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반구의 10월, 살구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지난여름 잼을 졸이고 남은 살구씨가 창가 병에 한 줌 모여 있습니다. 단단한 껍질을 깨면 아몬드와 모양이 비슷한 알맹이가 나오니 한 알쯤 맛보고 싶어집니다. 이 알맹이의 독성은 옛 의서와 지금의 성분 분석 자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기 전에 그 내용부터 살펴볼까요?
《동의보감》이 적은 행핵인
《동의보감》은 17세기 초 조선의 허준이 펴낸 의서입니다. 이 책은 과일을 모은 과부(果部)에 살구(Prunus armeniaca) 씨의 속 알맹이를 행핵인(杏核仁)이라는 이름으로 실었습니다. 원문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달면서 쓰다고 했고, 독이 있다(有毒)는 말도 함께 밝혀 두었습니다.
약으로 쓸 때의 조건도 남아 있습니다. 산에서 난 살구는 약에 쓰지 못하고 집 뜰에 심은 살구를 써야 한다고 했고, 한 껍질에 알맹이가 두 개 든 쌍인(雙仁)은 골라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옛 의서의 기록이며 현대 의학의 판단과는 다릅니다. 원문이 약재로 다루었다고 해서 지금 집에서 살구씨를 약처럼 먹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문과 풀이는 호미클럽 동의보감의 행핵인 항목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허준, 《동의보감》 탕액편 과부(果部), 행핵인(杏核仁)
아미그달린, 오늘의 성분 분석과 견주면
살구씨에 아미그달린(amygdalin)이 들어 있다는 점은 성분 분석으로 확인되었고, 쓴 살구씨는 특히 함량이 높습니다. 아미그달린이 몸 안에서 분해되면 사이안화물(cyanide)이 생깁니다. 씨에 함께 든 에멀신(emulsin)은 β-글루코시다아제(beta-glucosidase)의 하나로, 아미그달린을 분해해 사이안화수소(hydrogen cyanide)를 냅니다. 그래서 여러 식품안전 기관이 하루 섭취량에 제한을 두거나 주의를 당부해 왔습니다.
두 기록을 견주면 겹치는 곳과 다른 곳이 함께 보입니다.
- 겹치는 곳: 400여 년을 사이에 두고도 두 기록 모두 이 씨에 독이 있다고 봅니다.
- 다른 곳: 《동의보감》은 독을 적으면서도 약재로 다루었고, 쓸 것과 버릴 것을 살구가 자란 곳과 한 껍질 속 알맹이 수로 갈랐습니다. 지금의 식품안전 기관은 쓴 씨인지, 하루에 얼마나 먹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효능보다 위해를 줄이는 쪽으로 안내합니다. 쓰임도 달라져, 지금은 살구씨로 기름을 짜거나 화장품 원료로 쓰기도 합니다.
모아 둔 씨는 화분에 심어 보세요
창가의 살구씨는 먹는 대신 심어 보세요. 북반구 기준으로 3월과 11월이 심는 달입니다. 씨부터 키운다면 11월에 껍질째 화분이나 밭에 묻어 두세요. 살구씨는 겨울 추위를 한 차례 겪어야 싹이 잘 트는 편이라, 가을에 묻으면 이듬해 봄에 싹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살구는 이른 봄에 꽃이 피므로, 늦서리가 잦은 지역이라면 찬 공기가 고이는 낮은 자리는 피해 주세요.
다만 씨에서 자란 나무는 어미 나무와 맛이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첫 열매를 보기까지 여러 해가 걸립니다. 열매를 일찍 거두고 싶다면 3월에 접붙인 묘목을 심는 편이 낫습니다. 수확은 북반구 기준 6~7월입니다.
식탁에는 과육을 올려 보세요
살구에서 먹는 쪽은 과육입니다. 잘 익은 살구를 반으로 갈라 씨를 빼고, 플레인 요구르트나 리코타처럼 부드러운 치즈와 함께 내 보세요. 살구의 산미가 유제품의 순한 맛과 어울립니다.
제철이 짧으니 잼으로 만들어 두고 먹어 보세요. 살구는 산과 펙틴(pectin)이 적당해 잼으로 잘 굳습니다. 잼을 졸일 때도 씨는 빼고 과육만 씁니다. 가게에서 살구씨나 그 가공품을 산다면 먼저 포장의 섭취량 안내와 주의 문구를 읽어 보세요. 심는 달과 어울리는 음식은 호미클럽 작물도감의 살구씨 항목에 모아 두었습니다.
오늘은 11월에 화분에 묻을 살구씨 몇 알만 따로 골라 두고, 창가 병에는 '먹지 않음'이라고 적어 아이 손이 닿지 않는 선반에 올려 두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