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깊어지면 고추밭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포기는 잎에 물기 밴 갈색 반점이 번지며 시들어 가는데, 바로 옆 포기는 같은 흙에서도 멀쩡하게 열매를 맺습니다. 물 주는 양도 볕도 비슷한데 왜 이렇게 갈릴까요? 최근 한 연구는 그 차이가 고추 안에 사는 아주 작은 세균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고추 안에 사는 세균
식물의 뿌리와 잎 속에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함께 삽니다. 이렇게 식물 조직 안에 자리 잡고 사는 미생물을 내생균(內生菌)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운데 슈도모나스라는 세균 무리는 흙과 뿌리에서 흔히 발견되고, 식물이 가뭄을 견디거나 병을 이겨 내도록 돕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구진이 살핀 A32라는 슈도모나스 세균도 그런 종류입니다. 유전자를 통째로 분석해 보니 양분을 끌어모으고 스트레스를 견디게 하는 유전자와 함께, 카로티노이드나 시안화수소(HCN)처럼 특별한 물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시안화수소가 하는 두 가지 일
시안화수소는 원래 강한 독성으로 다른 미생물을 억누르는 물질로 알려져 왔습니다. 실제로 A32가 만든 시안화수소는 고추에 반점세균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의 수를 줄였습니다.
이 연구가 눈여겨본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시안화수소가 병원균을 직접 누르는 데 그치지 않고, 고추 스스로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신호를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A32는 산화 스트레스에도 잘 버텼는데, 이는 시안화수소가 세포 안에서 산화와 환원의 균형을 조절하는 데도 관여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고추의 방어 유전자가 작동하다
연구진은 A32를 고추 씨앗에 미리 묻혀 심은 뒤 반점세균병 병원균을 접종했습니다. 그 결과 병징이 줄고 식물 안 병원균 양도 낮아졌습니다.
식물 안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방어와 관련된 효소인 페닐알라닌 암모니아 분해효소(PAL)의 활성이 높아졌고, 병에 맞서는 유전자 PR1과 항균 물질을 만드는 유전자 DEF1이 더 활발히 작동했습니다. 반면 활성산소를 없애는 항산화 효소의 활성은 오히려 낮아졌습니다. 시안화수소가 활성산소를 없애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방어 신호로 쓰도록 조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A32의 시안화수소는 병원균을 누르는 동시에 고추가 미리 면역을 갖추도록 한 셈입니다. 다만 이는 실험실과 온실에서 확인한 결과로, 아직 밭에서 널리 검증된 단계는 아닙니다.
텃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세균을 당장 사다 쓸 수 있는 제품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도 텃밭 고추를 위해 기억해 둘 점은 있습니다. 고추의 방어력은 잎 위에서만 정해지지 않고, 뿌리와 흙 속 미생물과의 관계에서도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흙 속 미생물이 다양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챙겨 보세요.
- 잘 삭은 퇴비를 넣어 흙을 살려 주세요.
- 같은 자리에 고추를 해마다 이어 심는 일은 피해 주세요.
- 잎에 물을 끼얹기보다 포기 아래 흙에 물을 주세요.
- 비 온 뒤 젖은 잎끼리 닿지 않도록 간격을 넉넉히 두세요.
병이 보일 때마다 약부터 뿌리기보다, 튼튼한 흙에서 시작하면 고추가 스스로 병을 견디는 힘을 키웁니다.
